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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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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막 일주일 전이던 지난 8월 20일, 선수촌 정문 맞은편에 ‘사랑의 옹달샘’이 설치됐다. 파라솔 4개와 큰 텐트 하나가 전부였다. 노방선교에 대한 안 좋은 인식 때문에 일주일 동안 경찰 조사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곳이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곳임을 인정받은 후엔 날마다 축제가 벌어졌다. 탈락한 선수들이 하염없이 우는 곳, 한국 아이스크림을 무료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곳, 국가별로 편안하게 경기전략을 세우는 곳, 코치가 선수를 지도하고 상담하는 곳, 그리고 6개 국어로 제작된 전도지와 성경이 하나씩, 한 묶음씩 재빠르게 나가는 곳이었다. 대회 마지막 즈음엔 예수님 알리미들이 집에서 가져온 선물과 메모장을 드리는 선물 센터도 되었다. 2주 동안 이곳은 ‘기적의 현장’이었다.

그 중심에 국제예수제자들(JDI) 대표인 채영애(63) 박사가 있었다. 채 박사는 전 세계에서 온 선수, 임원, 기자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의 문화를 접하고 가져갈 수 있도록 잠시도 쉬지 않고 열정을 쏟아냈다. 그는 이곳에서 먼저 친구가 돼주고 관계의 해빙기를 맞은 후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친구’란 선교 전략을 마음껏 펼쳐 기독교계의 눈길을 끌었다. 최근 충북 진천군 행정리 사랑의마을교회에서 채 박사를 만나 헌신으로 일관된 그의 삶과 사역 이야기를 들었다.

혼돈과 방황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도 없는 제가 주님의 전임 일꾼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공중보건하고 제자양육만 하면 될 줄 알았어요.”

미국과 영국의 명문대에서 공중보건학, 교육학, 신학, 심리학, 정치학, 사회학, 지역사회개발 등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걷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솔직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외하고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어머니 때문에 선택이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늘 작은 교회에서 여전도사로 사역하거나 초등학교 교사가 돼 이웃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고 싶어 했으나 결혼 때문에 포기했다. 어머니는 결혼 후에는 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들여 함께 살았다. 채 박사는 장로교 목사였던 아버님 밑에서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다. 행복했다. 가정형편이 넉넉하고 부모님의 사랑이 극진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한 달에 두 번씩 신약을 완독하며 중학생이 된 그에게 끊임없이 성경읽기를 요구했다. 열심히 읽고 또 읽었으나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영적 방황이 시작됐다.

감수성이 예민한 중3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의 삶은 한 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살림을 도맡아야 했고 남동생 둘을 돌보느라 심한 위궤양을 앓기 시작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교회를 계속 열심히 다니며 ‘완전히 성결된 삶’을 추구했다. 마태복음 5장 48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재혼을 하시고 가정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국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학비를 대줄 수 없다고 하여 대구 동산간호학교에 입학했다. 소용돌이 치는 가정을 떠나 기숙사 생활은 즐거웠다.

1967년 10월의 어느 수요일, 그는 그토록 해결되지 않던 천국소유의 확신을 갖는 사건을 만났다.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한 삶만이 천국을 소유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그에게 구원의 화살처럼 날아온 것은 창세기 15장 6절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나니”란 말씀이었다.

‘아브라함이 믿었기 때문에 의롭고 완전하다고 하면 예수님을 믿는 나도 완전하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천국 가는 데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

곧바로 교회로 향했다. 이날 이후 지옥 가는 걱정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를 괴롭히던 출혈성 위궤양은 수술로 깨끗이 나았다.

전임 일꾼으로 훈련받다

간호학교 졸업 후 대구 동산병원에서 간호사생활을 시작했다. 반복되는 생활 속에 그의 마음속을 늘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이 생활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아닐 것이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더 가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품게 된 데는 어릴 때 항상 보아온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 하면 이웃에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던 모습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을 정도다.

동산병원에서 외과과장으로 있던 미국인 선교사 시블 박사가 거제도로 의료선교를 떠났다. 6개월만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생각에 그도 거제도로 향했다. 시블 박사는 반겨주었다. 너무 일이 고되어 다른 간호사들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도시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6개월이 지나도 돌아갈 수 없었다. 주말에는 주일학교 어린이와 중고등부 학생을 가르쳤다.

국제의료기구에서 아담스라는 영국인 여의사가 파송됐다. 대부호의 딸인 아담스는 자신이 졸업한 영국 브리스틀대에 장학금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장학금의 첫 수혜대상자로 저를 선택해 건강방문학을 공부하라고 제안했습니다. 학비뿐 아니라 생활비, 책값까지 지급하는 풀 스칼라십이었습니다.”

73년 영국에 유학했다 1년 후 다시 거제도로 돌아왔다. 경험을 살려 거제도 3개 면 3만명의 건강을 책임졌다. 마을건강사업을 추진하며 건강 수준을 올려놓았다. 당시 한국 평균 영아사망률이 1000명당 52명인데 거제도는 17명이었다. 세계적인 프로젝트로 평가받았다.

거제도에서 6년간 생활하다 영적인 고갈을 느꼈다. 다시 유학을 떠나 미국 미시간대와 존스홉킨스대에서 공부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고급 공무원으로 일하며 적지 않은 임금을 받았다. 그러나 1년 후 ‘이건 아니다’란 생각이 또 들었다.

“그때 제 인생이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장 먹을 게 없어도 삶을 가치 있게 살고 싶었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시고 제가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게 성공 아닙니까?”

결혼, 공부, 공무원 중 공부를 택했다. 다시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에 유학, 공중보건학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전투하듯 치러내던 어느 날, 책꽂이에 꽂아두었던 ‘10단계 성경교재’가 눈에 띄었다. 차근차근 성경을 읽으며 주님을 의지하던 옛 신앙이 회복됐다. 세상의 염려와 유혹 속에 자신의 생명이 자라지 못함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김준곤 목사의 소개로 미국 줄리안센터에서 공동체 훈련과정을 마쳤다. 훈련을 마친 후에는 국제 기독교지역사회개발기구에서 일하며 선교에 대한 실천과 방법론을 배웠다. 풀러신학교에서 기독교심리학과 세계선교학을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저를 전임 일꾼으로 만들 구체적인 훈련을 차근차근 시키셨던 것 같습니다.”

모든 공부를 마쳤을 때 만 40세가 됐다. 자신의 진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했다. 전혀 생각지 않던 응답이 왔다. 한국의 시골마을에 들어가 공동체 ‘사랑의집’을 시작해 교회를 개척하고 예수문화를 파급하며 세계선교를 하라는 것이었다.

사랑의 친구

미국에서 전공을 살려 교수나 전문직업을 가진 채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려던 그에게 주님의 명령은 당혹스러웠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제주도 다음으로 복음화가 안 된 지역을 찾았다. 충북 진천을 사역지로 선택했다. 가진 것이 없던 그는 12년째 사람이 살지 않은 폐가를 임차했다. ‘사랑의 친구’ 사역을 본격 시작했다.

2주 정도 봐주러 온 이모는 아세아연합신학대 강의로 서울을 오가는 조카를 대신해 ‘사랑의 친구’ 역할을 많이 했다. 이모는 이제 완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마을에서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됐다.

“이모가 성공하지 않았다면 이 전략은 안 되나 보다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마을 분들이 마실 와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들을 털어놨습니다. 이곳이 제일 안전한 곳일 뿐 아니라 상담을 통해 치유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친구가 되어주는 선교전략이 통했습니다. 이모와의 대화를 통해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3년8개월 후 사랑의마을교회(채형기 목사)를 세웠는데 출석교인이 한때 100명을 넘긴 적도 있었다. 1년간 실험적으로 운영할 계획이었던 사랑의집이 성공하면서 채 박사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선교사 훈련과 제자양육을 병행하고 있다.

“‘사랑의 친구’ 사역은 평신도였던 이모님이나 현재 함께 사역하는 79세의 김영숙 권사님, 오토바이 사고로 뇌를 다쳐 단기기억을 상실한 홍종필 성도도 해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누구나 전도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제자연구원을 운영하며 ‘사랑의 친구’ 사역자들을 전도 전문가로 키워냈다. 이모는 9명을 제자양육했다. 88년에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말씀에 순종해 ‘국제예수제자들’을 설립했다.

“선교지로 나가는 원심선교도 중요하지만 비용을 적게 들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들어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구심선교가 정말 중요합니다.”

채 박사는 경제적 부강과 성숙한 민주주의, 높은 교육 수준, 잘 갖춰진 영적 준비와 뜨거운 선교 열정, 섬기는 지도자로서의 가치관 태동 등이 어우러져 이제 한국이 구심선교를 펼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말했다.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이후 더욱 구심선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는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저는 지금 굉장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해냈다면 그런 인력이 우리 한국교회에 얼마나 많습니까. 어려움이 있다면 저희에게 인력과 재원이 없어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는 분들, 저희와 동역자가 되어 함께 일하지 않으시겠습니까?”(jdichristmas.org)

진천=글 최영경 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ykcho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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