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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문화

흙으로 돌아 가다

1,801 2011.03.1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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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언어학을 전공하시고  대구 계명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김태한 이사장님의 원숙하신 삶의 지식과 경험과 지혜를 닮은 글입니다. 
현재 복음 장학회 이사장이시며 영호남 은퇴 교수회 회장으로서 우리 사회와
삶의 후진들을 윤택하게 해주시는 현역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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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으로 돌아 가다


인간은 귀소(歸巢)의 본능 때문인지 자기가 태어난 고국산천을 극히

사랑한다. 잊지도 못한다. 1950년대에 어느 대학 교수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김포 공항에 내리자 감사와 감격에 넘쳐 대지에 입을 맞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나 역시 초등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국내외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갖은 고난과 병고에 시달릴 때면 어린 시절 고향의 산과 들, 강가에서

뛰어놀던 일들이 꿈 속에 자주 나타남을 많이 경험하였다.

명사들은 여행을 할 때 책 몇 권을 읽으라고 권한다. 당연한 충고이다.

그만큼 시간을 아끼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기차나 버스를 탈 때,

한 번도 책 읽을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차 창가에서 비치는 정경은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나에게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저 푸른 산들과 골짜기를 보라! 누가 만들었는가? 저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과 골목길을 보라! 누가 만들었는가?

거기에는 무한한 사연들이 담기어 있지 않나? 감나무, 대추나무,

호박꽃 등을 누가 심었으며, 누구를 위해 심었을까? 거기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의 이야기가 담뿍 담겨 있을 것이다.

외국에 오랫동안 살던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한국의 산천은 너무 아름답다. 길모퉁이 돌 때마다 나타나는 산천이

전부 공원처럼 느껴진다.󰡓고.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이 아름다운 산천을 가진 것을 무한히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런데 산업 사회의 물결과 가족 장례 제도의 관습이 우리의 아늑한

산천을 훼손시키고 있다. 요사이 차 창가에 비친 저 푸르고 높고 깊은

산은 어떠한가? 푸르게 이어지던 산 중턱은 간 데 없고 군데군데

구멍이 뻥 뚫려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어 가고 있다.

누구도 감히 올라가기 힘든 산골이지만 명당자리에는 벌써 묘지가

자리 잡고 있어서 많은 뜻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요 몇 년 사이 어느 심산유곡에 가 보아도 벌써 대리석 묘비 화강암들로
짜여진 호화 무덤이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여의도 광장 몇 배만한 산지가 유택으로 개발되어 가고 있다고 하니

얼마 안 가서 우리의 금수강산은 무덤 터로 변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분묘는 거의 없다. 돌로 단단히 무덤을 치장하니

무덤은 거의 영구적이다.

어느 날, 나는 서울에 올라간 걸음에 소망교회 수양관과 그 관내에
 
있는 소망교회의 성도의 묘지를 탐방하기로 했었다.

나는 시외버스를 타고 경기도 곤지암에 하차하여 그 곳에서 택시로
 
갈아타고 소망수양관 주차장에 하차하였다.

정문의 위치를 몰라서 정원 쪽으로 보이는 문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잠시 서서 주위 환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수양관은 붉은 벽돌에 3층 건물이고, 3면이 소나무 숲의 산으로 싸여

있어서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수양관 내부 휴게실의 벽과

천장 그리고 방바닥의 색깔과 건축 재료, 장식물과 의자, 테이블의

배치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휴게실에서의 전망도 매우 아름다웠다.

내부 구조와 시설도 돌아보았다.

나는 이 수양관이 산 속에 있는 별장과 다를 바 없을 정도의 시설을

갖춘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소망교회 묘지의 소재를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곳 운전기사에게 위치를 물었더니, 수양관 바로 정문에 있다

고 하였다. 가보니 불과 8.9평 남짓한 자갈밭에 대리석으로 만든

우아하고 큰 기념 비석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곳이 바로 묘지라고 하였다.

이 돌비석에 󰡐소망교회 성도의 묘󰡑라는 한글 문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고, 여러 성경 구절이 비석에 적혀 있었다. 대충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전면에는 이런 구절들이 적혀 있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의 낮고 천한 몸이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큰 비석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납골당을 찾아보았다. 이 큰 비석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한 나는 조금 전에 만났던

운전기사에게 화장된 재 가루의 안치 장소를 물었다.

기사의 말에 의하면 성도들의 시신은 화장하여 가루를 만들어 이 곳

비석 주위에 뿌린다는 것이다. 비가 오면 시신 가루는 자갈,

모래 속으로 흘려 들어가고, 화창한 날이면 물을 뿌려 땅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장례법은 아마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 장례법을 소망교회 당회장 곽선희 목사님이 만들었고,

목사님도 세상 떠난 후에는 이런 식으로 여기 장례된다고 하였다.

벌써 200여 명의 소망교회 성도들의 시신 재 가루가 뒤섞이어 땅 속에

묻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장례법은 오직 지원자에게만 적용된다

고 하였다.

세계 각국의 시신 매장 법은 매우 다양하다. 몇 년 전 성지 순례 때

이집트 수도 카이로시를 통과한 적이 있다. 이 때 나를 놀라게 했던 것

은 수십 리 길 시가지가 온통 무덤의 연속인 것 같다는 점이었다.
 
어떤 무덤은 호화로운 벽돌집과 같았다. 더구나 그 무덤 위에 집을 지어
빈민들이 살고 있는 것이 간혹 눈에 띄었다.

그 때 현지 안내원은 무덤의 규모로 그 사람의 살아생전의 신분, 계급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제왕의 시신을 영구 보전하기

위하여 큰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현대에서도 몇몇 국가 지도자의

시신이 영구 보존되어 있다. 세계 각국의 장례법이 천태만상으로

상이한 것은 개인과 집단의 가치관, 내세관, 종교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우리나라 소망교회의 장례법은 유일무이하고 독특하다.

자기 개인의 무덤을 없애고 한 자리에 묻혀 예수님 재림하실 때 다함께

부활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깊고 강한가를 알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죽어서 숲이 우거지고 아담한 양지

바른 곳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벌써

생전에 풍수지리의 명당을 찾아 그 곳을 자기와 가족들의 묘지로

정하고 가꾸어 놓고 있다.

그렇다면 제사는 어떻게 지내는가? 기독교에서는 제사 대신에 추도식

이 있다. 추도식 날이 되면 부모가 세상을 떠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가족, 친척, 친지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조상의 은덕을 되새기며
음식을 나누어 먹고 산소에도 간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제사 정신은

돌아가신 고인의 영이 돌아와서 정성껏 만든 차례 상을 드신다는 믿음

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가신 고인의
영이 지상에는 계시지 않으니 대신 살아 계실 때 온갖 정성으로 부모를

모셔야 하는 것을 강조한다. 역시 소망교회 교인들도 여기 묻힌 고인들

이 세상 떠난 날에 수양관에서 추도예배를 드린다고 하였다.

여기서 제사의 기원을 잠깐 살펴본다. 제사는 중국의 하(夏)나라와
 
상(商)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 제사는 부모에게 제사를 지낸 것

이 아니고 뛰어난 황제에게만 지냈다.

그 후 왕위가 세습제로 변하면서 자기 선조의 명성을 돋우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초기에는 왕실에서만 지냈는데 그 후에 제후들도 지내고 재상들도

지내다가 후세에 와서는 󰡐우리 조상도 훌륭하다.󰡑라는 반발심에 왕의
허락 없이 일반 백성도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나 고구려 때 특수한 왕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이 제사의 풍습은 불교가 성행하던 신라 시대나 고구려 시대에는

없다가 고려 말 주자의 성리학이 들어오고 정몽주, 이색 등이 사당을

짓기 시작하면서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상이 아닌 뛰어난 인물

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었고, 그 때에도 왕가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고려와 차별을 두기 위해 성리학을 받아들

였고, 불교 사상을 경시하였으며, 주자의 사상을 보급했다. 제사는 이때

부터 왕가와 고위층 양반들만 지냈다. 일반 백성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양반의 권위가 무너지면서부터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조선말 계급

사회가 무너지면서 서민 누구나 다 제사를 지냈고 여기에 무속 신앙이

한 몫을 했다. 지나친 관혼상제와 유흥의 사회 제도에는 조선을 이조로

강등시키고 민족정신을 흐리게 한 일본 제국주의 책략이 숨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지금은 온 민족이 다 양반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사 역시 시대의 산물이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제도 풍습은

아니다.

이 제사 제도 풍습은 가족 위주의 사회상으로 변하였고, 극단적으로

내 가족 외에는 생각지 않는 배타주의로 발전된 측면도 있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택할 때도 반드시 아주 가까

운 친척 중에서 택한다. 이 점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점

이다. 서양 사람들이 우리나라 어린이를 얼마나 많이 입양하였는가?

이 사실이 좋은 예가 된다. 어떻게 보면 유교의 충효 사상은 우리나라에

서는 국가에 대한 충보다 조상에 대한 효(孝)사상으로 변하였다.

이 가족주의 효친 사상은 산업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재벌 총수 중심의 가장 가까운 일가친척만 그 회사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유능한 인재라도 결국은 그 회사에서

밀려나고 만다. 이런 식의 회사 구조에 누가 충성을 다하겠는가?

오늘날의 IMF 한파의 원인을 여기에서 찾아보는 것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교에서는 부모 공경의 도리를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의 십계명 중 첫째 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까지는 하나님 섬김에

대한 계명이고, 다섯 번째 계명은󰡒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이

다. 부모 공경함을 그만큼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 말씀도 있다.

󰡒너희가 살아있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

󰡓기독교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재하시는 하나님 섬김 다음으로

   부모 공경을 강조하고 있다.

부모가 살아 계시는 동안 지극히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효를 다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세상을 떠난 후에 영은 하늘나라로 간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죽은 혼이 떠돌아다닐 수는 없다.

나는 소망교회 수양관을 떠나면서 소망교회가 참된 나라사랑을

실천하고 있음을 확신하였다. 어차피 죽은 몸은 얼마 못 가서 완전

흙으로 돌아간다. 혼이 떠난 흙덩어리를 그렇게 많은 돈과 인력을

동원하여 호화 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그 진의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참으로 부모를 위한 일인가? 한갓 자식들이 남의 눈을 의식하여

효성을 나타내는 수단인가? 아니면 자기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방법인

가? 깊이 반성하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커다란 개혁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의 아름다운 강토를 보존하기 위하여 우리의 장례 제도를 더욱

개선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 후손에게 물려 줄 값진 유업이 될 것이다.
다음 성구를 다시 음미해 본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19절.

 

  1998. 5.  
 
  김 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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